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평가 (문단 편집) ===== 반론 ===== 강릉을 보유하여 오랫동안 생존했지만 사실이지만 어느정도는 결과론이다. 몽골과 남송이 벌였던 [[양양 공방전]]을 고려하면 강릉의 방위력은 양양과 번성에 한참미치지 못한다. 인선 문제나 나라의 내부 사정으로 손쉽게 돌파당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애초부터 회남을 보호하기 위해서 남군, 무릉, 영릉을 점령한다는 논리도 문제가 있는데 남군, 무릉, 영릉의 군사들과 물자들은 강릉을 방위를 위해서 회남에 투자시키기 어렵다. 남군, 무릉, 영릉은 회남보다도 강릉에 거리가 가깝다. 형주를 없으면 회남을 수호하지 못한다는 예시들은 결과론에 가깝다. 거기다가 오나라는 위나라 다툼에서 운이 좋았던 경우가 있는데 '''오나라가 혼란에 빠졌을때 위나라도 내부 사정이 좋지 못했다.''' [[이궁지쟁]]이 발생한 시기와 [[고평릉 사변]] 시기가 어느정도 비슷하다. 그리고 제갈각의 자멸해서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는데 제갈각 사망 이후에 사마사는 장집과 이풍을 비롯한 반사마씨 세력과 마찰이 있었고 255년에 관구검과 문흠이 반란이 일어나고 255년에 사망했다. 사마소는 사마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놀라서 당황했으며 사태를 수습하는라 정신 없었다. [[손휴]]가 [[손침]]을 제거하고 258월 12월 8일에 권력을 잡아서 잡았다. 손휴가 손침을 제거하고 나서 오나라는 완전하지 않지만 어느정도 안정시켰는지 사마소가 263년에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침공한 나라가 오나라가 아닌 촉한이다. 행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촉한의 멸망 이후에도 약 26년이나 생존했는데 서진의 내부 사정이 좋지 않았다. 오나라를 침공하는데 중요한 교두보인 익주는 [[촉한]]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지배력을 강화시키는데 고생했을 것이며 [[종회]]의 반란으로 성도에서 전란이 발생해서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독발수기능]]의 난으로 오나라에 침공할 여유다 없었고 사마소가 [[사마염]]을 보좌시키기 위해서 준비한 인재인 [[가충]]이 오나라 정벌에 부정적이었다. '''이런 행운들을 살펴보면 오나라가 과연 우수해서 역대 남조 국가들보다도 오래 유지한 사실이 오나라가 뛰어나기 때문인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